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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에서 내 인생을 바꾼 첫 책.
당신의 미래와.... 지금의 시간의 소중함...그리고 책의 힘을 느낄수 있다.
* 인생엔, 시간이 별로 없다. 인생은 짧다.
60% 점유율을 확보하지 못하면, 그건 점유율도 아니다.
손정의 처럼 나도 인생 50년 계획을 그때 세웠었다.
오늘에서야 다시 한번보고 그 계획을 재수정해야겠다.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따라잡고 말것이다..
나는 얼마나 행운인가. 동시대에 따라잡을 위대한 영웅이 있으니~
당신은 당신이 초월하고싶은 영웅이 있습니까?
[손정의 연구 #1] 전기 '손정의 바람이 분다' 중에서
[손정의 연구 #2] 17세때 미유학…한달만에 고교졸업
[손정의 연구 #3] "SW 뜬다" 치밀한 분석뒤 창업
손정의의 인생 최대 위기는 26세때 찾아왔다. 그해 봄 그는 중증 만성간염 판정을 받았다. 정밀검진 결과 최악의 경우 5년을 못넘길 수 있다는 선고가 떨어졌다. 일에 미쳐 밤낮 안가리고 뛰어다닌 덕이었다. 창업 3년째로 접어든 소프트뱅크가 한창 커 나가던 때였다.
그러나 위기때 더욱 강렬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게 그의 장점이다. "반드시 완치해 보이겠다"며 의욕을 불태웠다. 병실에 누워 체념 대신 사업구상 짜내기에 몰두했다. 완쾌될 때까지 3년여간 병원 신세를 지며 독파한 책은 4000권에 달했다. "병원 침대에서 평생 먹고 살 지식을 얻었다"고 그는 말한다.
손자병법을 자기류로 발전시킨 '신손자병법'도 이때 짜낸 것이었다. "일류가 안될 사업은 손대지 않고,공격-수비의 균형을 갖추며 시스템으로 승부한다"(일류공수군) "전체를 조감하며 정보와 전략을 세우고, 70%의 승률에서 싸운다"(정정약칠투)….
여기엔 손정의 이해에 불가결한 많은 키워드가 담겨져 있다. 70% 이길 자신이 있을 때 손댄다는 '70% 법칙'이 대표적 예다. 그는 혁명가를 자처한다. 하지만 위험한 곡예도 서슴치않는 모험가는 아니다. 주도면밀한 계산 위에서만 행동하는 냉정한 현실주의자이다. 예컨대 그는 회사경영을 파악할 때 무려 1000개 지표를 동원해 빈틈없이 검증한다. 이른바 '1000중 체크' 철학이다.
창업 분야로 컴퓨터 유통을 선택한 것도 치밀한 분석의 결과였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23세에 귀국한 그는 고향 후쿠오카에 사무실부터 차렸다. 그리고 1년여동안 창업 아이템을 찾기 위한 시장조사에 전념했다. 그 결과 그는 제조업보다 정보산업이,하드웨어보다 소프트산업이 번성하는 시대가 온다는 확신을 얻었다. '승률 70% 이상'의 결론이 내려진 이상 망설일 것이 없었다.
81년 9월 손정의는 드디어 비즈니스 세계에 깃발을 올렸다. 자본금 1000만엔으로 도쿄 이치가야역 근처에 일본소프트뱅크㈜를 설립, 소프트웨어 도매업을 시작했다. 창업 직후 아르바이트 사원 2명을 사무실에 '도열'시켜놓고 일장연설을 했다는 일화도 있다. "10년뒤 500억엔,언젠가는 수조엔 회사가 된다." 연설을 듣던 사원은 기가 질려 곧 회사를 그만두었다.
하지만 호언장담은 현실이 됐다. 때맞춰 일본에선 전자오락 열풍과 PC(개인용 컴퓨터) 붐이 불어 주었다. 그의 소프트웨어 유통사업은 순풍에 돛단듯 급성장했다. 잇따라 창간한 컴퓨터 잡지도 속속 히트쳤다. 회사 내부에서 연매출액 대신 월매출 지표를 사용할 정도였다. 매달 몇십%씩 매출이 주체못할 정도로 늘어나는 탓이었다.
창업 1년뒤 '주간아사히'에 화려하게 소개되며 매스컴에도 데뷰했다. '컴퓨터로 거부를 쌓은 신데렐라 보이'. 이런 제목 아래 주간아사히는 그를 '괴물 실업가'로 소개하고 있다. 곧이어 '일본 PC소프트웨어협회'를 만들어 회장에 취임한다. 그리고 호언장담대로 창업 10년뒤엔 매출 500억엔을 돌파하고 만다.
일부에선 운이 좋았다고 깎아내린다. 하지만 손정의는 "애초부터 성공이 예정돼있었다"고 말한다. 소프트웨어 유통-출판이라는 인프라(기반서비스)를 사업 아이템으로 잡았기 때문이다. 소프트웨어 제조회사라면 제품이 안 팔릴 경우 망할 수 있다. 하지만 인프라 사업은 산업 자체가 팽창하는 한 성공이 보장된다.
자동차 회사 몇개가 도산해도 고속도로 톨게이트는 번성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이를 손정의는 '중립성의 법칙'으로 부른다. 예측 불가능한 개별 요인에 좌우되지 않을 곳에 투자한다는 철학이다. 디지털 정보세계의 '인프라 공급자'인 한,실패위험은 없다고 그는 단언한다.
34세때 그는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 "일본에서 살아갈 두 딸에 대한 아버지로서의 최소한의 배려"라고 그는 설명하고 있다. 한국 성을 지키기 위해 우여곡절도 많았다. 관청이 일본식 성으로 바꿀 것으로 조건으로 못박았기 때문이다. 그로선 이름과 정체성마저 버리며 국적을 구걸할 이유가 없었다.
궁리 끝에 손정의는 일본인 부인부터 성을 손씨로 고치게 했다. 그리고는 "일본인 중에도 손씨가 있다"며 관리를 다그쳤다. 과연 딱 한 명 있었다. 일본에 손씨 가문을 창시하며 국적을 취득했다는 유명한 일화다. 일본에서 그의 이름은 '손 마사요시(정의의 일본식 발음)'로 불린다.
그는 정신적 무국적주의자를 자처한다. "나의 본적은 인터넷"이란 게 입버릇이다. 어느 나라 사람이란 의식 자체가 없다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같은 코리안 재패니즈로,그를 오랫동안 지켜본 하야시 다케시 아사히솔라 사장의 관점은 다르다. "진한 피가 아니었다면 오늘날 손정의의 성공은 없었다.핏줄 속에 면면히 흘러내려온 한반도의 피가 그를 비등시켰다."
[손정의연구 #4] "강한 것이 아름답다" 우량기업 사냥
손정의의 30대 후반은 '질풍노도의 시대'였다. 37세 생일 직전 그는 염원의 주식공개(점두시장등록)를 성사시킨다. 이것이 신호탄이었다. 그후 2년여동안 디지털 관련 우량기업을 무더기로 사들이며 파죽지세의 확장을 거듭했다. '손정의 제국'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95년 4월 미국 매사추세츠주 컴덱스사. 손정의와 컴덱스측 셸던 아델슨 회장이 단둘이 마주앉아 지분매각 교섭을 벌이고 있었다. 인사말이 오간뒤 손정의는 느닷없이 '단발승부'를 제안했다. "당신이 받고 싶은 가격을 딱 한번만 말하시오. 타당한 가격이면 흥정없이 지불하겠소.하지만 무리하게 부른다면 그것으로 협상은 끝이오."
기가 꺾인듯 아델슨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아델슨의 입이 열렸다. "8억달러 내시오." 자리에서 일어난 손정의가 손을 내밀었다. "오케이.협상은 성립됐습니다." 세계최대 컴퓨터 전시업체 컴덱스의 주인이 바뀌는 데는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손정의를 세계무대에 화려하게 등장시킨 대형 인수극의 서막이었다.
즉흥적인 결정이 아니었다. 손정의가 컴덱스 매수를 위해 검토한 시뮬레이션 자료는 2만쪽 분량에 달했다. 철저한 사전 검토 끝에 8억5000만달러까지 지불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려두고 있었다. 일단 수용가능한 가격이라면 더 깎으려 흥정하지 않는다. 몇푼 아끼는 것보다 꼭 먹어야 할 사냥감을 확실하게 낚아채는 게 중요하다고 그는 말한다.
세계최대 컴퓨터 출판사 지프데이비스 퍼블리케이션 매수 때는 '적장'의 집에 쳐들어 갔다. 지프사 대주주인 테드 퍼스트맨 회장의 뉴욕 맨션을 찾아가 역시 '단발승부'로 결판지었다. 퍼스트맨 회장은 21억달러를 불렀고, 손정의는 군말없이 받아들였다. 일대일 협상과 단발승부는 큰 기업사냥 때마다 등장했다. 사냥감을 점찍으면 바로 핵심을 파고들어 단숨에 승부를 끝내곤 했다.
기업매입엔 천문학적인 자금이 투입됐다. 94년말부터 2년간 쓰인 금액만 무려 5000억엔에 달했다. 자금조달을 위해 손정의는 M&A(기업인수합병)의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는 수법을 즐겨썼다. 우선 우량기업을 인수해 소프트뱅크의 주가(시장가치)를 띄운다. 상승한 주가를 바탕으로 유리한 조건에 사채를 발행, 자금을 대량 조달하는 방법이다.
조달한 자금으로는 더 큰 우량기업을 사들인다. 이런 식으로 확대재생산을 거듭하며 덩치를 기하급수적으로 불려간다. 이른바 '눈덩이 전략'이다. 자칫 사상누각이 될 수도 있지만 그는 제반 상황을 절묘하게 컨트롤해 가며 완벽한 '고공비행'을 해냈다. 때맞춰 인터넷 주식붐이 불어주는 행운까지 겹쳤다.
일부에선 그가 미국 기업사냥에서 "바가지썼다"고 빈정댄다. 하지만 디지털 세계의 최강자들과 나란히 설 수 있었던 것은 '비싼 쇼핑' 덕분이었다. 이 무렵부터 그는 빌 게이츠,미디어왕 루퍼트 머독 등과 '셔츠 차림으로 수시로 만나 퍼스트 네임을 부르는' 친분을 쌓게 된다. 그리고 디지털 세계를 움직이는 '비즈니스 이너써클(핵심그룹)'의 정회원으로 확고한 위치를 굳힌다.
강자와의 교제법을 보면 그의 현실노선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강한 것은 아름답다'는 강자 신봉의 미학을 갖고 있다. "강한 것에는 거스르지 않는다"는 게 지론이다. 야후 매입때 빌 게이츠나 스콧 맥널리(선 마이크시스템즈),짐 클라크(넷스케이프) 등에 일일이 이메일을 보내 의견을 물었다는 일화도 있다. 실력자들이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매입에 나섰다고 한다.
야후 매입은 빌 게이츠가 감탄할만큼 손정의의 감각이 돋보였다. 손정의가 야후에 손을 댄 것은 야후가 설립된지 만 1년 되던 때였다. 적자 투성이의 영세기업 야후의 가치를 한눈에 알아본 그는 100여억엔을 투자,지분 35%를 사들였다. 다들 비웃었으나 상장 첫날 야후 주가는 투자액의 3배를 기록했다. 지금은 인터넷 세계의 확고부동한 입구이다.
야후를 수중에 넣는 것으로 손정의의 '6대 인프라 장악' 구상은 대략 완성을 보았다. ①유통 ②네트워크 ③테크놀로지 ④전시회 ⑤인터넷 ⑥미디어 인프라 분야에 각각 세계 최강의 계열사를 포진할 수 있게 된다. 그 2년여동안 매입한 기업은 100여개에 달했다. 이 시기 손정의는 "마치 마약을 먹은듯 열정에 들떠 있었다"고 친우인 사와다 HIS사장은 전한다.
95년말 손정의는 빌 게이츠로부터 한 권의 책을 선물받는다. '미래를 말한다'라는 게이츠의 저서였다. 표지 뒷장엔 "마사(손정의의 애칭), 너도 나 못지않은 승부꾼이구나!"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비즈니스 승부사를 자처하는 게이츠가 보낼 수 있는 최상의 찬사인 셈이었다.
[손정의연구 #5] "기술 MS"는 가고 "서비스 SB"시대로
소프트뱅크(SB)의 주가총액은 현재 마이크로소프트(MS)의 15% 수준이다. 그런데도 손정의가 '빌 게이츠 추월'을 장담하는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다. 포인트는 인터넷이다. 21세기의 비즈니스 패권은 인터넷이 좌우하게 된다. 그 인터넷 세계의 핵심 인프라는 손정의 자신이 장악하고 있다는 논리다.
그에 따르면 디지털 정보혁명은 '테크놀로지(기술)에서 서비스로의' 점프를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컴퓨터 하드-소프트웨어 기술이 주역인 시대였다. 그래서 독보적 기술력을 보유한 MS나 인텔이 승리자가 됐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정보서비스의 시대이다. 즉 인터넷을 통한 서비스 제공력이 승패를 좌우한다. 그 싸움은 자신있다고 손정의는 말한다.
"MS가 테크놀로지를 쥐고 천하를 호령하지만…. 언제까지 계속될지 의문이다. 테크놀로지 비즈니스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인터넷은 모든 산업과 연결된다. 금융, 유통에서 미디어까지 무궁무진하게 사업을 펼칠 수 있다. 비즈니스의 그릇이 차원부터 다르다."('손정의, 기업의 젊은 사자'중)
그가 인터넷을 최종 승부처로 결심한 것은 3년전 쯤의 일인 듯 하다. 그 무렵부터 경영자원을 인터넷에 총투입하기 시작했다. 인터넷 관련기업을 집중매입하며 그룹 비중을 인터넷 쪽으로 급선회했다. "세계 최대의 인터넷 재벌이 된다"는 슬로건도 등장했다. '인터넷 종합상사' 같은 인터넷그룹을 선언한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그만큼 인터넷 혁명의 파도를 타는 것이 빨랐다.
이미 SB그룹은 인터넷의 명실상부한 세계 최강이다. 인터넷 비즈니스의 많은 분야별 최강 기업이 SB 산하에 편입돼 있다. 야후와 지오시티를 필두로 하는 인터넷 시청률은 압도적 1위이다. 네티즌이 드나드는 입구를 쥐고 있다는 것은 SB그룹의 독보적 잠재력이다. "인터넷 공간내 '사람의 흐름'은 이미 장악했다"고 그는 말한다.
SB그룹의 인터넷 비즈니스는 금융과 유통(전자상거래)을 양대 축으로 편성돼 있다. 돈(금융)과 물건의 흐름을 동시에 석권한다는 전략이다. 미국 인터넷업계 주식시가 총액은 약 40조엔. 이중 SB그룹 비중은 7%에 달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그는 말한다. 앞으로 5년간 660개 회사를 더 사들인다는 계획. 그 대부분이 인터넷 관련이다. 계획이 완성되면 세계 전역을 커버하는 웅장한 인터넷 재벌의 위용이 갖춰진다. 미국에 400개, 일본-유럽 각 150개, 아시아 50개, 남미 30개사의 계열사를 포진시킨다는 전략이다.
780개 계열사는 그와 10명 남짓한 스탭이 함께 관리하게 된다. 일본내 주가총액 8위(은행제외)인 SB의 사원은 현재 11명이다. 한달전 지주회사로 전환하면서 1000여명 사원을 사업과 함께 분사시켰다. 몇년내 6명까지 줄일 계획이다.
계열사 통제란 불가능할 뿐 아니라 관리할 생각도 없다고 그는 밝힌다. 각 계열사는 철저하게 자주적으로 운영된다. 살아있는 생물처럼 생존과 자기증식의 본능을 발휘하게 하는 시스템이다. 그가 할 일은 각 계열사에 인센티브와 자기 진화의 유전자를 심어주는 것 뿐이다. 그리고 전체를 조감하며 어디에서 진군하고 어디서 퇴각할지만 결정한다.
지분은 30% 정도만 보유한다. 통제 아닌 '영향'을 미치기에 적당한 지분율이다. 자기증식의 원리가 발휘되지 않는 계열사는 매각해 버린다. SB그룹을 가족에게 물려줄 생각은 없다. 막내동생 손태장(손태장·27)도 SB에 입사하지 못하도록 말렸다. 그래서 손태장은 도쿄대학 재학중 형과 똑같이 인터넷 벤처 비즈니스를 창업했다. 형제간 비즈니스 경쟁도 관심거리이다.
"SB는 플레이어(선수)가 되지 않는다. 일류 선수를 모아 게임 전체를 기획할 뿐이다."(98년6월) 이것을 그는 '군전략'이라 부른다. 실제 최근 비즈니스는 공동출자나 제휴가 주류다. 상대는 철저하게 최강자다. "넘버원이 아니면 손잡지 않는다"는게 그의 지론이다. "손정의는 걸출한 코디네이터(조정·기획자)라는 점"이라고 일본맥도널드 후지타 사장은 평한다.
그가 19살때 세웠던 인생50개년 계획은 지금까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30대에 1000억엔의 군자금을 마련한다는 계획은 목표를 초과달성했다. 이제 40대의 '큰 승부' 한판이 나올 차례이다. 승부가 인터넷을 테마로 한 비즈니스 혁명을 의미함은 분명해졌다. 인터넷의 거대한 물결이 멈추지 않는 한 자신의 혁명은 성공할 수밖에 없다고 그는 자신한다.
그가 그리는 '손정의 제국'의 미래는 백년대계가 아니다. 300년 앞을 내다보는 '300년 대계'를 추구한다. "300년 뒤에도 세계 톱을 달리는 초일류 기업을 만든다. 그 때 우리 그룹의 종업원은 100만명이 돼있을 것이다."
당신의 미래와.... 지금의 시간의 소중함...그리고 책의 힘을 느낄수 있다.
<일류공수군>
최고의 자리에 앉은 사람은 공수의 균형을 취하며, 무리를 지어 싸워야 한다.
<도천지장법>
싸움에 이기기 위해서는 다섯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즉, 도, 천, 지, 장, 법이다.
<지신인용엄>
장수는 지, 신, 인, 용, 엄을 갖추어야한다.
<정정략칠투>
정상에 올라서서 전체를 내려다보고, 정보를 가능한 많이 몽 전략을 세우고,
7할의 승산이 있을때 일을 시작한다.
<풍림화산해>
삼킬때는 바다처럼 하라.
최고의 자리에 앉은 사람은 공수의 균형을 취하며, 무리를 지어 싸워야 한다.
<도천지장법>
싸움에 이기기 위해서는 다섯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즉, 도, 천, 지, 장, 법이다.
<지신인용엄>
장수는 지, 신, 인, 용, 엄을 갖추어야한다.
<정정략칠투>
정상에 올라서서 전체를 내려다보고, 정보를 가능한 많이 몽 전략을 세우고,
7할의 승산이 있을때 일을 시작한다.
<풍림화산해>
삼킬때는 바다처럼 하라.
* 인생엔, 시간이 별로 없다. 인생은 짧다.
<인생 50년 계획>
-20대에 이름을 날린다.
-30대에 최소한 1천억의 군자금을 마련한다.
-40대에 사업에 승부를 건다
-50대에 사업을 완성한다 (매상고 연 1조)
-60대에 다음 세대에게 사업을 물려준다.
<사업 리스트>
- 앞으로 50년간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일
- 다른 누구도 생각해 내지 못한 독특한 비즈니스
- 적어도 10년 이내에 한국에서 최고가 될 수 있는 비즈니스
<조언>
- 거래를 하려면 처음부터 그 업계의 넘버원과 하라.
- 적자 사업이라면 흑자로 돌아서도록 반드시 혁신을 감행해라.
- 강자와 맞대결 할 수 없을땐 <약자의 전략>을 구사!
-20대에 이름을 날린다.
-30대에 최소한 1천억의 군자금을 마련한다.
-40대에 사업에 승부를 건다
-50대에 사업을 완성한다 (매상고 연 1조)
-60대에 다음 세대에게 사업을 물려준다.
<사업 리스트>
- 앞으로 50년간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일
- 다른 누구도 생각해 내지 못한 독특한 비즈니스
- 적어도 10년 이내에 한국에서 최고가 될 수 있는 비즈니스
<조언>
- 거래를 하려면 처음부터 그 업계의 넘버원과 하라.
- 적자 사업이라면 흑자로 돌아서도록 반드시 혁신을 감행해라.
- 강자와 맞대결 할 수 없을땐 <약자의 전략>을 구사!
60% 점유율을 확보하지 못하면, 그건 점유율도 아니다.
손정의 처럼 나도 인생 50년 계획을 그때 세웠었다.
오늘에서야 다시 한번보고 그 계획을 재수정해야겠다.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따라잡고 말것이다..
나는 얼마나 행운인가. 동시대에 따라잡을 위대한 영웅이 있으니~
당신은 당신이 초월하고싶은 영웅이 있습니까?
[손정의 연구 #1] 전기 '손정의 바람이 분다' 중에서
[손정의 연구 #1] 전기 '손정의 바람이 분다' 중에서
소프트뱅크 손정의(일본명 손 마사요시)사장이 '빌 게이츠 추월'을 선언했다. "10∼15년내 마이크로소프트를 능가해 세계 1위가 된다." (문예춘추 인터뷰10월) 과격할 정도로 자신감이 넘쳤지만 아무도 허황되다고 트집잡지 않았다. '인터넷의 지배자'(Master of the Internet)로 불리는 그는 이제 빌 게이츠와 비교되는 세계적 비즈니스 리더이다. 40대 초반에 세계정상을 질주하는 코리안 재패니즈(한국계 일본인) 손정의. 야망과 도전으로 가득찬 그의 42년 인생을 파헤친다.
도쿄 아자부에 있는 그의 저택은 거대한 성채 같다. 최고급 주택가의 960평 부지 위에 세워진 3층 건물(연건평 810평)은 공사비만 40억엔 (약450억원)이 들었다고 한다. 집 전체가 컴퓨터로 관리되는 최첨단 인텔리전트 빌딩이다. 싱글핸디의 골프광인 그는 지하층을 골프연습장으로 꾸몄다. 그린 경사가 마음대로 조절되고 필드처럼 악천후(비나 바람)도 재현할 수 있다.
시가 50억엔은 나간다는 이 집엔 그와 부인 유미(손우미)씨,두 딸이 살고 있다. 상식을 넘는 호화로움에 한 주간지가 헬기를 띄워 항공사진을 게재한 일까지 있다. 그 옆으로 미쓰비시그룹 창업자 이와사키 가문의 저택이 마주 보인다. 일본 최고 재벌과 어깨를 맞댄 저택이 그의 오늘을 상징하는듯 하다.
이 집이 완공된 것은 2년전,40세 때의 일이었다. 그전까지는 줄곧 자기집 없이 임대 아파트에서 살아왔다. 결혼 21년만에 처음 지은 집이 상상을 불허하는 초호화판이었던 셈이다. 넘버원이 아니면 차라리 안한다는 그의 '일등주의'가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물론 그는 충분한 자격이 있다. 미국 포브스지는 지난 5월 손정의를 일본내 세번째 부자로 랭크했다(세계순위 46위). 포브스가 평가한 개인재산은 7700억엔. 그가 보유한 소프트뱅크 주식(4400만주)을 당시 시가(1만7400엔)로 계산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후 주가는 2배 이상 뛰어 올랐다. 보유 주식만 따져도 재산이 1조9000억엔에 달한다. 지금 시점에서 다시 계산하면 그가 일본 최고의 부자일 가능성이 크다.
소프트뱅크(이하 SB로 약칭)의 주가총액은 일본 기업(은행 제외)중 8위로 올라섰다. 일본을 대표하는 마쓰시타전기나 혼다자동차를 웃돈다. 상장 5년만에 이룬 실적이다. SB가 소유한 유가증권의 평가익은 2조엔(지난 3월말 현재). 기업 가치는 3조엔으로 증권업계는 평가하고 있다.
손정의가 기업사냥을 시작했던 것은 4년 전이었다. 세계최대 컴퓨터 전시업체 컴덱스 매입을 시작으로 현란한 M&A(인수합병)를 거듭했다. 야후(세계최대 인터넷 검색페이지),지프데이비스 퍼블리케이션(세계 최대 인터넷 출판),킹스턴 테크놀로지(세계 최대 메모리보드 메이커)…. 사들인 회사는 예외없이 그 분야 최강자였다. "싸구려 2류기업을 1류로 키우기엔 시간이 없다"고 그는 말한다.
4년전 8개이던 자회사는 120개로 늘었다. SB그룹은 이제 누구나 인정하는 세계 최대 인터넷 재벌이다. 전세계에서 인터넷 트래픽(정보소통량)이 많은 순서로 베스트 12를 늘어놓으면 그중 4개가 SB그룹 계열사이다. 베스트 12의 트래픽중 SB그룹의 점유율은 50%에 달한다. SB그룹이 깔아놓은 '도로'를 통하지 않고는 인터넷 세계를 제대로 통행하기 힘들다.
미국의 인터넷 금융회사 톱6중 5개가 계열사이고,130종의 인터넷 잡지를 매달 900만부씩 발행하고 있다. 인터넷 세계에 광활한 영토를 구축한 '손정의 제국'은 지금도 무서운 속도의 확대재생산을 거듭중이다. "네트워크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이란 것은 USA투데이의 평이다. 비즈니스위크는 '실리콘밸리를 움직이는 실력자'에 일본인으론 유일하게 그를 올려놓았다.
한때 일본에서 손정의는 이단자 취급을 받았다. 지금은 "일본경제를 침체에서 구할 영웅"(저널리스트 다하라 소이치로)이다. 혹은 "21세기형 비즈니스 리더"(이나모리 가즈오 교세라회장)로 비유되기도 한다. 일본판 나스닥 구상에서 고속인터넷망 계획까지,일본재계의 화두는 온통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얼마 전엔 계열사를 5년안에 780개로 늘린다는 목표를 공표,또한번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미국(400개)을 중심으로 일본(150개)-유럽(150개)- 아시아(50개)를 망라하는 범지구적 재벌로 확장한다는 계획이었다. 한달에 11개 꼴로 기업을 사들여야 한다는 숨가쁜 계산이 나온다. 하지만 그는 이미 2000억엔의 기업사냥 자금을 확보해 놓았다며 자신만만해 한다.
자신감은 그의 막강한 디지털 인프라(기반시설) 장악력에서 비롯된다. 120개 계열사가 디지털 세계 곳곳에 건설한 '도로'며 '다리'를 무기로 그는 혁명을 일으키려 한다. "빌 게이츠나 루퍼트 머독이 아무리 훌륭한 수퍼스타라 해도 그들이 춤추는 무대는 내 것이다. 나는 일개 배우보다 디지털 혁명 전체를 기획하는 연출자가 되고싶다."
소프트뱅크 손정의(일본명 손 마사요시)사장이 '빌 게이츠 추월'을 선언했다. "10∼15년내 마이크로소프트를 능가해 세계 1위가 된다." (문예춘추 인터뷰10월) 과격할 정도로 자신감이 넘쳤지만 아무도 허황되다고 트집잡지 않았다. '인터넷의 지배자'(Master of the Internet)로 불리는 그는 이제 빌 게이츠와 비교되는 세계적 비즈니스 리더이다. 40대 초반에 세계정상을 질주하는 코리안 재패니즈(한국계 일본인) 손정의. 야망과 도전으로 가득찬 그의 42년 인생을 파헤친다.
도쿄 아자부에 있는 그의 저택은 거대한 성채 같다. 최고급 주택가의 960평 부지 위에 세워진 3층 건물(연건평 810평)은 공사비만 40억엔 (약450억원)이 들었다고 한다. 집 전체가 컴퓨터로 관리되는 최첨단 인텔리전트 빌딩이다. 싱글핸디의 골프광인 그는 지하층을 골프연습장으로 꾸몄다. 그린 경사가 마음대로 조절되고 필드처럼 악천후(비나 바람)도 재현할 수 있다.
시가 50억엔은 나간다는 이 집엔 그와 부인 유미(손우미)씨,두 딸이 살고 있다. 상식을 넘는 호화로움에 한 주간지가 헬기를 띄워 항공사진을 게재한 일까지 있다. 그 옆으로 미쓰비시그룹 창업자 이와사키 가문의 저택이 마주 보인다. 일본 최고 재벌과 어깨를 맞댄 저택이 그의 오늘을 상징하는듯 하다.
이 집이 완공된 것은 2년전,40세 때의 일이었다. 그전까지는 줄곧 자기집 없이 임대 아파트에서 살아왔다. 결혼 21년만에 처음 지은 집이 상상을 불허하는 초호화판이었던 셈이다. 넘버원이 아니면 차라리 안한다는 그의 '일등주의'가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물론 그는 충분한 자격이 있다. 미국 포브스지는 지난 5월 손정의를 일본내 세번째 부자로 랭크했다(세계순위 46위). 포브스가 평가한 개인재산은 7700억엔. 그가 보유한 소프트뱅크 주식(4400만주)을 당시 시가(1만7400엔)로 계산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후 주가는 2배 이상 뛰어 올랐다. 보유 주식만 따져도 재산이 1조9000억엔에 달한다. 지금 시점에서 다시 계산하면 그가 일본 최고의 부자일 가능성이 크다.
소프트뱅크(이하 SB로 약칭)의 주가총액은 일본 기업(은행 제외)중 8위로 올라섰다. 일본을 대표하는 마쓰시타전기나 혼다자동차를 웃돈다. 상장 5년만에 이룬 실적이다. SB가 소유한 유가증권의 평가익은 2조엔(지난 3월말 현재). 기업 가치는 3조엔으로 증권업계는 평가하고 있다.
손정의가 기업사냥을 시작했던 것은 4년 전이었다. 세계최대 컴퓨터 전시업체 컴덱스 매입을 시작으로 현란한 M&A(인수합병)를 거듭했다. 야후(세계최대 인터넷 검색페이지),지프데이비스 퍼블리케이션(세계 최대 인터넷 출판),킹스턴 테크놀로지(세계 최대 메모리보드 메이커)…. 사들인 회사는 예외없이 그 분야 최강자였다. "싸구려 2류기업을 1류로 키우기엔 시간이 없다"고 그는 말한다.
4년전 8개이던 자회사는 120개로 늘었다. SB그룹은 이제 누구나 인정하는 세계 최대 인터넷 재벌이다. 전세계에서 인터넷 트래픽(정보소통량)이 많은 순서로 베스트 12를 늘어놓으면 그중 4개가 SB그룹 계열사이다. 베스트 12의 트래픽중 SB그룹의 점유율은 50%에 달한다. SB그룹이 깔아놓은 '도로'를 통하지 않고는 인터넷 세계를 제대로 통행하기 힘들다.
미국의 인터넷 금융회사 톱6중 5개가 계열사이고,130종의 인터넷 잡지를 매달 900만부씩 발행하고 있다. 인터넷 세계에 광활한 영토를 구축한 '손정의 제국'은 지금도 무서운 속도의 확대재생산을 거듭중이다. "네트워크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이란 것은 USA투데이의 평이다. 비즈니스위크는 '실리콘밸리를 움직이는 실력자'에 일본인으론 유일하게 그를 올려놓았다.
한때 일본에서 손정의는 이단자 취급을 받았다. 지금은 "일본경제를 침체에서 구할 영웅"(저널리스트 다하라 소이치로)이다. 혹은 "21세기형 비즈니스 리더"(이나모리 가즈오 교세라회장)로 비유되기도 한다. 일본판 나스닥 구상에서 고속인터넷망 계획까지,일본재계의 화두는 온통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얼마 전엔 계열사를 5년안에 780개로 늘린다는 목표를 공표,또한번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미국(400개)을 중심으로 일본(150개)-유럽(150개)- 아시아(50개)를 망라하는 범지구적 재벌로 확장한다는 계획이었다. 한달에 11개 꼴로 기업을 사들여야 한다는 숨가쁜 계산이 나온다. 하지만 그는 이미 2000억엔의 기업사냥 자금을 확보해 놓았다며 자신만만해 한다.
자신감은 그의 막강한 디지털 인프라(기반시설) 장악력에서 비롯된다. 120개 계열사가 디지털 세계 곳곳에 건설한 '도로'며 '다리'를 무기로 그는 혁명을 일으키려 한다. "빌 게이츠나 루퍼트 머독이 아무리 훌륭한 수퍼스타라 해도 그들이 춤추는 무대는 내 것이다. 나는 일개 배우보다 디지털 혁명 전체를 기획하는 연출자가 되고싶다."
[손정의 연구 #2] 17세때 미유학…한달만에 고교졸업
[손정의 연구 #2] 17세때 미유학…한달만에 고교졸업
손정의 성장기 전설중엔 고등학교를 한달 만에 졸업했다는게 유명하다. 그것도 미국의 고교. 비결은 머리가 아니라 배짱과 실행력이었다. 갓 유학온 소년이 벌이는 대담한 행각은 그의 타고난 승부사 기질을 말해주고 있다.
그는 17세 되던 해 미 유학길에 오른다(74년2월). 고교 1년 여름 방학때 어학연수로 다녀온 미국의 경험이 그에겐 너무도 강렬했다. 부모를 설득,학교를 중퇴하고 미국으로 향했다. 6개월 어학코스를 거친 뒤 샌프란시스코의 한 고교에 입학허가를 받았다.
입학 첫날 교과서를 죽 훑어본 그는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교과서 내용이 다 아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교장에게 달려가 서툰 영어로 월반시켜 달라고 졸랐다. 설득력이 있었는지 교장은 허락했다. 1주일만에 2학년이 됐다.
2학년 교과서는 4일만에 혼자 독파했다. 또 월반을 요청해 허락받았다. 이런 식으로 3학년 과정도 며칠만에 끝냈다. 여기까지 꼭 2주일 걸렸다. 이번엔 졸업시켜 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졸업자격을 받으려면 검정시험에 합격해야 했다. 시험은 2주일 뒤였다.
2주일뒤 검정시험장. 문제지를 받아든 그는 아찔했다. 한 과목 시험지가 책 한권 두께였다. 모르는 단어가 많아 그의 영어 실력으론 문제를 읽기도 벅찼다. 그는 시험감독관과 협상을 벌이기로 했다. 영-일사전을 쓸 수 있게 해주고 수험시간도 연장해 달라고 요구했다.
감독관은 황당했다. 하지만 "검정시험은 언어능력을 평가하는 게 아니다"는 손정의의 논리가 옳긴 옳았다. 끈질기게 달려드는 그의 요구를 감독관은 결국 받아주고 말았다. 손정의는 이날 밤11시까지 시험지와 씨름했다. 둘째,셋째날은 자정에 끝났다. 며칠뒤 그는 합격 통지를 받았다.
일본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6년의 미 유학중 그는 자유로운 발상과 자기주장을 배웠다. 자신의 사업가 소양은 미국이 90%를 길러 주었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재일한국인 컴플렉스를 극복했다는 게 큰 수확이었다. 미국에서 비로소 그는 일본식 이름을 버리고 '손정의'라는 본명을 쓰기 시작했다.
17세까지 그의 이름은 '야스모토 마사요시'였다. 시가(좌하)현 재일한국인 집안에서 4남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조부는 일제시대 대구에서 규수에 건너온 탄광노동자였다. 부친이 파친코-음식점 사업으로 성공,집안은 유복했다. 동네에서 가장 먼저 승용차를 산 것도 그의 집이었다.
유치원 때 동네 소년이 "조센진"하며 돌을 던졌다. 머리에서 피가 쏟아졌지만 한국인이라 맞는다는 사실이 더 충격이었다. 재일한국인의 운명을 처음 실감한 사건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는 교사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공립학교 교사는 일본 국적이라야 한다는 말을 듣고 또한번 좌절했다.
성인이 된후 그는 소년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차별을 피하기 위해 한국인임을 줄곧 숨겨야 했다. 항상 마음 한구석이 어두웠다."(92년) 차별을 느낄수록 그의 성격은 공격적이 돼갔다.
유별난 '일등주의'는 이런 성장경험에서 비롯됐다. 공부건, 축구건 최고가 아니면 참질 못했다. 중3때 '료마(판본용마·막부말기 혁명가)가 간다'를 읽고 사업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물론 하려면 1등이라야 했다. 이때부터 "일본 제일의 사업가가 된다"는 게 입버릇이 됐다.
미국 유학도 "일본 최고가 되려면 미국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고교를 한달만에 마친 그는 홀리넴즈대를 거쳐 명문 버클리대학 3학년에 편입한다(77년). 같은해 동부에선 그의 협력자이자 라이벌인 빌 게이츠가 하버드대학을 자퇴했다. 두 디지털 영웅의 실제 만남은 그 18년후 이뤄진다.
버클리대학 시절은 공부와 사업 준비로 바빴다. 사업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그는 발명 아이디어를 짜내기로 했다. 하루 한 건씩 1년간 365건을 찾아낸다는 엄청난 목표를 세웠다. 목표달성은 실패했지만 발명노트에 250건의 아이템을 빼곡히 채울수 있었다.
그중 세계 최초의 전자음성번역기가 그의 사업 밑천이 됐다. 일본어로 키보드를 누르면 영어 음성이 나오는 휴대용 번역기였다. 이 아이디어를 일본 샤프에 1억엔에 팔아 창업자금을 마련했다. 손정의 신화의 탄생이 무르익고 있었다.
일본인 부인 유미(손우미)씨를 만난 것도 유학 시절이었다. 버클리법원에서 결혼서약을 마친 뒤 그는 부인을 앞에 세워놓고 일장연설을 했다. "20대에 깃발을 올리고,30대에 1000억엔의 군자금을 마련한다. 40대에 큰 승부를 벌여 50대에 완성시키고 60대에 후계자에 계승시킨다." 그 유명한 '인생 50년계획'이었다. 그의 나의 19세 때였다.
손정의 성장기 전설중엔 고등학교를 한달 만에 졸업했다는게 유명하다. 그것도 미국의 고교. 비결은 머리가 아니라 배짱과 실행력이었다. 갓 유학온 소년이 벌이는 대담한 행각은 그의 타고난 승부사 기질을 말해주고 있다.
그는 17세 되던 해 미 유학길에 오른다(74년2월). 고교 1년 여름 방학때 어학연수로 다녀온 미국의 경험이 그에겐 너무도 강렬했다. 부모를 설득,학교를 중퇴하고 미국으로 향했다. 6개월 어학코스를 거친 뒤 샌프란시스코의 한 고교에 입학허가를 받았다.
입학 첫날 교과서를 죽 훑어본 그는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교과서 내용이 다 아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교장에게 달려가 서툰 영어로 월반시켜 달라고 졸랐다. 설득력이 있었는지 교장은 허락했다. 1주일만에 2학년이 됐다.
2학년 교과서는 4일만에 혼자 독파했다. 또 월반을 요청해 허락받았다. 이런 식으로 3학년 과정도 며칠만에 끝냈다. 여기까지 꼭 2주일 걸렸다. 이번엔 졸업시켜 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졸업자격을 받으려면 검정시험에 합격해야 했다. 시험은 2주일 뒤였다.
2주일뒤 검정시험장. 문제지를 받아든 그는 아찔했다. 한 과목 시험지가 책 한권 두께였다. 모르는 단어가 많아 그의 영어 실력으론 문제를 읽기도 벅찼다. 그는 시험감독관과 협상을 벌이기로 했다. 영-일사전을 쓸 수 있게 해주고 수험시간도 연장해 달라고 요구했다.
감독관은 황당했다. 하지만 "검정시험은 언어능력을 평가하는 게 아니다"는 손정의의 논리가 옳긴 옳았다. 끈질기게 달려드는 그의 요구를 감독관은 결국 받아주고 말았다. 손정의는 이날 밤11시까지 시험지와 씨름했다. 둘째,셋째날은 자정에 끝났다. 며칠뒤 그는 합격 통지를 받았다.
일본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6년의 미 유학중 그는 자유로운 발상과 자기주장을 배웠다. 자신의 사업가 소양은 미국이 90%를 길러 주었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재일한국인 컴플렉스를 극복했다는 게 큰 수확이었다. 미국에서 비로소 그는 일본식 이름을 버리고 '손정의'라는 본명을 쓰기 시작했다.
17세까지 그의 이름은 '야스모토 마사요시'였다. 시가(좌하)현 재일한국인 집안에서 4남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조부는 일제시대 대구에서 규수에 건너온 탄광노동자였다. 부친이 파친코-음식점 사업으로 성공,집안은 유복했다. 동네에서 가장 먼저 승용차를 산 것도 그의 집이었다.
유치원 때 동네 소년이 "조센진"하며 돌을 던졌다. 머리에서 피가 쏟아졌지만 한국인이라 맞는다는 사실이 더 충격이었다. 재일한국인의 운명을 처음 실감한 사건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는 교사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공립학교 교사는 일본 국적이라야 한다는 말을 듣고 또한번 좌절했다.
성인이 된후 그는 소년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차별을 피하기 위해 한국인임을 줄곧 숨겨야 했다. 항상 마음 한구석이 어두웠다."(92년) 차별을 느낄수록 그의 성격은 공격적이 돼갔다.
유별난 '일등주의'는 이런 성장경험에서 비롯됐다. 공부건, 축구건 최고가 아니면 참질 못했다. 중3때 '료마(판본용마·막부말기 혁명가)가 간다'를 읽고 사업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물론 하려면 1등이라야 했다. 이때부터 "일본 제일의 사업가가 된다"는 게 입버릇이 됐다.
미국 유학도 "일본 최고가 되려면 미국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고교를 한달만에 마친 그는 홀리넴즈대를 거쳐 명문 버클리대학 3학년에 편입한다(77년). 같은해 동부에선 그의 협력자이자 라이벌인 빌 게이츠가 하버드대학을 자퇴했다. 두 디지털 영웅의 실제 만남은 그 18년후 이뤄진다.
버클리대학 시절은 공부와 사업 준비로 바빴다. 사업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그는 발명 아이디어를 짜내기로 했다. 하루 한 건씩 1년간 365건을 찾아낸다는 엄청난 목표를 세웠다. 목표달성은 실패했지만 발명노트에 250건의 아이템을 빼곡히 채울수 있었다.
그중 세계 최초의 전자음성번역기가 그의 사업 밑천이 됐다. 일본어로 키보드를 누르면 영어 음성이 나오는 휴대용 번역기였다. 이 아이디어를 일본 샤프에 1억엔에 팔아 창업자금을 마련했다. 손정의 신화의 탄생이 무르익고 있었다.
일본인 부인 유미(손우미)씨를 만난 것도 유학 시절이었다. 버클리법원에서 결혼서약을 마친 뒤 그는 부인을 앞에 세워놓고 일장연설을 했다. "20대에 깃발을 올리고,30대에 1000억엔의 군자금을 마련한다. 40대에 큰 승부를 벌여 50대에 완성시키고 60대에 후계자에 계승시킨다." 그 유명한 '인생 50년계획'이었다. 그의 나의 19세 때였다.
[손정의 연구 #3] "SW 뜬다" 치밀한 분석뒤 창업
손정의의 인생 최대 위기는 26세때 찾아왔다. 그해 봄 그는 중증 만성간염 판정을 받았다. 정밀검진 결과 최악의 경우 5년을 못넘길 수 있다는 선고가 떨어졌다. 일에 미쳐 밤낮 안가리고 뛰어다닌 덕이었다. 창업 3년째로 접어든 소프트뱅크가 한창 커 나가던 때였다.
그러나 위기때 더욱 강렬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게 그의 장점이다. "반드시 완치해 보이겠다"며 의욕을 불태웠다. 병실에 누워 체념 대신 사업구상 짜내기에 몰두했다. 완쾌될 때까지 3년여간 병원 신세를 지며 독파한 책은 4000권에 달했다. "병원 침대에서 평생 먹고 살 지식을 얻었다"고 그는 말한다.
손자병법을 자기류로 발전시킨 '신손자병법'도 이때 짜낸 것이었다. "일류가 안될 사업은 손대지 않고,공격-수비의 균형을 갖추며 시스템으로 승부한다"(일류공수군) "전체를 조감하며 정보와 전략을 세우고, 70%의 승률에서 싸운다"(정정약칠투)….
여기엔 손정의 이해에 불가결한 많은 키워드가 담겨져 있다. 70% 이길 자신이 있을 때 손댄다는 '70% 법칙'이 대표적 예다. 그는 혁명가를 자처한다. 하지만 위험한 곡예도 서슴치않는 모험가는 아니다. 주도면밀한 계산 위에서만 행동하는 냉정한 현실주의자이다. 예컨대 그는 회사경영을 파악할 때 무려 1000개 지표를 동원해 빈틈없이 검증한다. 이른바 '1000중 체크' 철학이다.
창업 분야로 컴퓨터 유통을 선택한 것도 치밀한 분석의 결과였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23세에 귀국한 그는 고향 후쿠오카에 사무실부터 차렸다. 그리고 1년여동안 창업 아이템을 찾기 위한 시장조사에 전념했다. 그 결과 그는 제조업보다 정보산업이,하드웨어보다 소프트산업이 번성하는 시대가 온다는 확신을 얻었다. '승률 70% 이상'의 결론이 내려진 이상 망설일 것이 없었다.
81년 9월 손정의는 드디어 비즈니스 세계에 깃발을 올렸다. 자본금 1000만엔으로 도쿄 이치가야역 근처에 일본소프트뱅크㈜를 설립, 소프트웨어 도매업을 시작했다. 창업 직후 아르바이트 사원 2명을 사무실에 '도열'시켜놓고 일장연설을 했다는 일화도 있다. "10년뒤 500억엔,언젠가는 수조엔 회사가 된다." 연설을 듣던 사원은 기가 질려 곧 회사를 그만두었다.
하지만 호언장담은 현실이 됐다. 때맞춰 일본에선 전자오락 열풍과 PC(개인용 컴퓨터) 붐이 불어 주었다. 그의 소프트웨어 유통사업은 순풍에 돛단듯 급성장했다. 잇따라 창간한 컴퓨터 잡지도 속속 히트쳤다. 회사 내부에서 연매출액 대신 월매출 지표를 사용할 정도였다. 매달 몇십%씩 매출이 주체못할 정도로 늘어나는 탓이었다.
창업 1년뒤 '주간아사히'에 화려하게 소개되며 매스컴에도 데뷰했다. '컴퓨터로 거부를 쌓은 신데렐라 보이'. 이런 제목 아래 주간아사히는 그를 '괴물 실업가'로 소개하고 있다. 곧이어 '일본 PC소프트웨어협회'를 만들어 회장에 취임한다. 그리고 호언장담대로 창업 10년뒤엔 매출 500억엔을 돌파하고 만다.
일부에선 운이 좋았다고 깎아내린다. 하지만 손정의는 "애초부터 성공이 예정돼있었다"고 말한다. 소프트웨어 유통-출판이라는 인프라(기반서비스)를 사업 아이템으로 잡았기 때문이다. 소프트웨어 제조회사라면 제품이 안 팔릴 경우 망할 수 있다. 하지만 인프라 사업은 산업 자체가 팽창하는 한 성공이 보장된다.
자동차 회사 몇개가 도산해도 고속도로 톨게이트는 번성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이를 손정의는 '중립성의 법칙'으로 부른다. 예측 불가능한 개별 요인에 좌우되지 않을 곳에 투자한다는 철학이다. 디지털 정보세계의 '인프라 공급자'인 한,실패위험은 없다고 그는 단언한다.
34세때 그는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 "일본에서 살아갈 두 딸에 대한 아버지로서의 최소한의 배려"라고 그는 설명하고 있다. 한국 성을 지키기 위해 우여곡절도 많았다. 관청이 일본식 성으로 바꿀 것으로 조건으로 못박았기 때문이다. 그로선 이름과 정체성마저 버리며 국적을 구걸할 이유가 없었다.
궁리 끝에 손정의는 일본인 부인부터 성을 손씨로 고치게 했다. 그리고는 "일본인 중에도 손씨가 있다"며 관리를 다그쳤다. 과연 딱 한 명 있었다. 일본에 손씨 가문을 창시하며 국적을 취득했다는 유명한 일화다. 일본에서 그의 이름은 '손 마사요시(정의의 일본식 발음)'로 불린다.
그는 정신적 무국적주의자를 자처한다. "나의 본적은 인터넷"이란 게 입버릇이다. 어느 나라 사람이란 의식 자체가 없다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같은 코리안 재패니즈로,그를 오랫동안 지켜본 하야시 다케시 아사히솔라 사장의 관점은 다르다. "진한 피가 아니었다면 오늘날 손정의의 성공은 없었다.핏줄 속에 면면히 흘러내려온 한반도의 피가 그를 비등시켰다."
[손정의연구 #4] "강한 것이 아름답다" 우량기업 사냥
손정의의 30대 후반은 '질풍노도의 시대'였다. 37세 생일 직전 그는 염원의 주식공개(점두시장등록)를 성사시킨다. 이것이 신호탄이었다. 그후 2년여동안 디지털 관련 우량기업을 무더기로 사들이며 파죽지세의 확장을 거듭했다. '손정의 제국'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95년 4월 미국 매사추세츠주 컴덱스사. 손정의와 컴덱스측 셸던 아델슨 회장이 단둘이 마주앉아 지분매각 교섭을 벌이고 있었다. 인사말이 오간뒤 손정의는 느닷없이 '단발승부'를 제안했다. "당신이 받고 싶은 가격을 딱 한번만 말하시오. 타당한 가격이면 흥정없이 지불하겠소.하지만 무리하게 부른다면 그것으로 협상은 끝이오."
기가 꺾인듯 아델슨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아델슨의 입이 열렸다. "8억달러 내시오." 자리에서 일어난 손정의가 손을 내밀었다. "오케이.협상은 성립됐습니다." 세계최대 컴퓨터 전시업체 컴덱스의 주인이 바뀌는 데는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손정의를 세계무대에 화려하게 등장시킨 대형 인수극의 서막이었다.
즉흥적인 결정이 아니었다. 손정의가 컴덱스 매수를 위해 검토한 시뮬레이션 자료는 2만쪽 분량에 달했다. 철저한 사전 검토 끝에 8억5000만달러까지 지불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려두고 있었다. 일단 수용가능한 가격이라면 더 깎으려 흥정하지 않는다. 몇푼 아끼는 것보다 꼭 먹어야 할 사냥감을 확실하게 낚아채는 게 중요하다고 그는 말한다.
세계최대 컴퓨터 출판사 지프데이비스 퍼블리케이션 매수 때는 '적장'의 집에 쳐들어 갔다. 지프사 대주주인 테드 퍼스트맨 회장의 뉴욕 맨션을 찾아가 역시 '단발승부'로 결판지었다. 퍼스트맨 회장은 21억달러를 불렀고, 손정의는 군말없이 받아들였다. 일대일 협상과 단발승부는 큰 기업사냥 때마다 등장했다. 사냥감을 점찍으면 바로 핵심을 파고들어 단숨에 승부를 끝내곤 했다.
기업매입엔 천문학적인 자금이 투입됐다. 94년말부터 2년간 쓰인 금액만 무려 5000억엔에 달했다. 자금조달을 위해 손정의는 M&A(기업인수합병)의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는 수법을 즐겨썼다. 우선 우량기업을 인수해 소프트뱅크의 주가(시장가치)를 띄운다. 상승한 주가를 바탕으로 유리한 조건에 사채를 발행, 자금을 대량 조달하는 방법이다.
조달한 자금으로는 더 큰 우량기업을 사들인다. 이런 식으로 확대재생산을 거듭하며 덩치를 기하급수적으로 불려간다. 이른바 '눈덩이 전략'이다. 자칫 사상누각이 될 수도 있지만 그는 제반 상황을 절묘하게 컨트롤해 가며 완벽한 '고공비행'을 해냈다. 때맞춰 인터넷 주식붐이 불어주는 행운까지 겹쳤다.
일부에선 그가 미국 기업사냥에서 "바가지썼다"고 빈정댄다. 하지만 디지털 세계의 최강자들과 나란히 설 수 있었던 것은 '비싼 쇼핑' 덕분이었다. 이 무렵부터 그는 빌 게이츠,미디어왕 루퍼트 머독 등과 '셔츠 차림으로 수시로 만나 퍼스트 네임을 부르는' 친분을 쌓게 된다. 그리고 디지털 세계를 움직이는 '비즈니스 이너써클(핵심그룹)'의 정회원으로 확고한 위치를 굳힌다.
강자와의 교제법을 보면 그의 현실노선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강한 것은 아름답다'는 강자 신봉의 미학을 갖고 있다. "강한 것에는 거스르지 않는다"는 게 지론이다. 야후 매입때 빌 게이츠나 스콧 맥널리(선 마이크시스템즈),짐 클라크(넷스케이프) 등에 일일이 이메일을 보내 의견을 물었다는 일화도 있다. 실력자들이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매입에 나섰다고 한다.
야후 매입은 빌 게이츠가 감탄할만큼 손정의의 감각이 돋보였다. 손정의가 야후에 손을 댄 것은 야후가 설립된지 만 1년 되던 때였다. 적자 투성이의 영세기업 야후의 가치를 한눈에 알아본 그는 100여억엔을 투자,지분 35%를 사들였다. 다들 비웃었으나 상장 첫날 야후 주가는 투자액의 3배를 기록했다. 지금은 인터넷 세계의 확고부동한 입구이다.
야후를 수중에 넣는 것으로 손정의의 '6대 인프라 장악' 구상은 대략 완성을 보았다. ①유통 ②네트워크 ③테크놀로지 ④전시회 ⑤인터넷 ⑥미디어 인프라 분야에 각각 세계 최강의 계열사를 포진할 수 있게 된다. 그 2년여동안 매입한 기업은 100여개에 달했다. 이 시기 손정의는 "마치 마약을 먹은듯 열정에 들떠 있었다"고 친우인 사와다 HIS사장은 전한다.
95년말 손정의는 빌 게이츠로부터 한 권의 책을 선물받는다. '미래를 말한다'라는 게이츠의 저서였다. 표지 뒷장엔 "마사(손정의의 애칭), 너도 나 못지않은 승부꾼이구나!"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비즈니스 승부사를 자처하는 게이츠가 보낼 수 있는 최상의 찬사인 셈이었다.
[손정의연구 #5] "기술 MS"는 가고 "서비스 SB"시대로
소프트뱅크(SB)의 주가총액은 현재 마이크로소프트(MS)의 15% 수준이다. 그런데도 손정의가 '빌 게이츠 추월'을 장담하는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다. 포인트는 인터넷이다. 21세기의 비즈니스 패권은 인터넷이 좌우하게 된다. 그 인터넷 세계의 핵심 인프라는 손정의 자신이 장악하고 있다는 논리다.
그에 따르면 디지털 정보혁명은 '테크놀로지(기술)에서 서비스로의' 점프를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컴퓨터 하드-소프트웨어 기술이 주역인 시대였다. 그래서 독보적 기술력을 보유한 MS나 인텔이 승리자가 됐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정보서비스의 시대이다. 즉 인터넷을 통한 서비스 제공력이 승패를 좌우한다. 그 싸움은 자신있다고 손정의는 말한다.
"MS가 테크놀로지를 쥐고 천하를 호령하지만…. 언제까지 계속될지 의문이다. 테크놀로지 비즈니스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인터넷은 모든 산업과 연결된다. 금융, 유통에서 미디어까지 무궁무진하게 사업을 펼칠 수 있다. 비즈니스의 그릇이 차원부터 다르다."('손정의, 기업의 젊은 사자'중)
그가 인터넷을 최종 승부처로 결심한 것은 3년전 쯤의 일인 듯 하다. 그 무렵부터 경영자원을 인터넷에 총투입하기 시작했다. 인터넷 관련기업을 집중매입하며 그룹 비중을 인터넷 쪽으로 급선회했다. "세계 최대의 인터넷 재벌이 된다"는 슬로건도 등장했다. '인터넷 종합상사' 같은 인터넷그룹을 선언한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그만큼 인터넷 혁명의 파도를 타는 것이 빨랐다.
이미 SB그룹은 인터넷의 명실상부한 세계 최강이다. 인터넷 비즈니스의 많은 분야별 최강 기업이 SB 산하에 편입돼 있다. 야후와 지오시티를 필두로 하는 인터넷 시청률은 압도적 1위이다. 네티즌이 드나드는 입구를 쥐고 있다는 것은 SB그룹의 독보적 잠재력이다. "인터넷 공간내 '사람의 흐름'은 이미 장악했다"고 그는 말한다.
SB그룹의 인터넷 비즈니스는 금융과 유통(전자상거래)을 양대 축으로 편성돼 있다. 돈(금융)과 물건의 흐름을 동시에 석권한다는 전략이다. 미국 인터넷업계 주식시가 총액은 약 40조엔. 이중 SB그룹 비중은 7%에 달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그는 말한다. 앞으로 5년간 660개 회사를 더 사들인다는 계획. 그 대부분이 인터넷 관련이다. 계획이 완성되면 세계 전역을 커버하는 웅장한 인터넷 재벌의 위용이 갖춰진다. 미국에 400개, 일본-유럽 각 150개, 아시아 50개, 남미 30개사의 계열사를 포진시킨다는 전략이다.
780개 계열사는 그와 10명 남짓한 스탭이 함께 관리하게 된다. 일본내 주가총액 8위(은행제외)인 SB의 사원은 현재 11명이다. 한달전 지주회사로 전환하면서 1000여명 사원을 사업과 함께 분사시켰다. 몇년내 6명까지 줄일 계획이다.
계열사 통제란 불가능할 뿐 아니라 관리할 생각도 없다고 그는 밝힌다. 각 계열사는 철저하게 자주적으로 운영된다. 살아있는 생물처럼 생존과 자기증식의 본능을 발휘하게 하는 시스템이다. 그가 할 일은 각 계열사에 인센티브와 자기 진화의 유전자를 심어주는 것 뿐이다. 그리고 전체를 조감하며 어디에서 진군하고 어디서 퇴각할지만 결정한다.
지분은 30% 정도만 보유한다. 통제 아닌 '영향'을 미치기에 적당한 지분율이다. 자기증식의 원리가 발휘되지 않는 계열사는 매각해 버린다. SB그룹을 가족에게 물려줄 생각은 없다. 막내동생 손태장(손태장·27)도 SB에 입사하지 못하도록 말렸다. 그래서 손태장은 도쿄대학 재학중 형과 똑같이 인터넷 벤처 비즈니스를 창업했다. 형제간 비즈니스 경쟁도 관심거리이다.
"SB는 플레이어(선수)가 되지 않는다. 일류 선수를 모아 게임 전체를 기획할 뿐이다."(98년6월) 이것을 그는 '군전략'이라 부른다. 실제 최근 비즈니스는 공동출자나 제휴가 주류다. 상대는 철저하게 최강자다. "넘버원이 아니면 손잡지 않는다"는게 그의 지론이다. "손정의는 걸출한 코디네이터(조정·기획자)라는 점"이라고 일본맥도널드 후지타 사장은 평한다.
그가 19살때 세웠던 인생50개년 계획은 지금까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30대에 1000억엔의 군자금을 마련한다는 계획은 목표를 초과달성했다. 이제 40대의 '큰 승부' 한판이 나올 차례이다. 승부가 인터넷을 테마로 한 비즈니스 혁명을 의미함은 분명해졌다. 인터넷의 거대한 물결이 멈추지 않는 한 자신의 혁명은 성공할 수밖에 없다고 그는 자신한다.
그가 그리는 '손정의 제국'의 미래는 백년대계가 아니다. 300년 앞을 내다보는 '300년 대계'를 추구한다. "300년 뒤에도 세계 톱을 달리는 초일류 기업을 만든다. 그 때 우리 그룹의 종업원은 100만명이 돼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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